스티브, 지금도 꿈꾸고 있지요?
우리는 정치가나 행정관료가 디자인을 외치는 시대에 산다. 하지만 그런 제스처들이, 디자인의 가치가 커졌다거나 디자이너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디자인이라는 말의 정의는 여전히 모호하고, 그 덕에 디자인은 오늘날 모든 장소에서 아무나 쓰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사물의 외피만을 떠올리며 디자인을 말한다. 디자인의 초라한 정의에 인심을 쓴다 하더라도 디자인을 장식이나 예술과 동일시하지는 말아야 한다. 디자인은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잘 디자인된 망치가 하나의 형태로서 조각처럼 아름답다 해도 시원하게 못을 때리고 있는 망치보다 빛날 리 없다.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작동방식입니다. 디자인을 잘하려면 이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품의 본질에 완벽하게 통달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지요.”
차기 아이폰의 발표로 세상이 술렁이던 가을날 스티브 잡스가 눈을 감았다. 잡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덤(fandom)의 애도는 급기야 신제품을 그의 유품으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기업가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는 다국적 소비자라니,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잡스보다 더 극적으로 재기한 기업가나,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번 자본가가 없지 않을 텐데 우리는 왜 그의 죽음을 유독 슬퍼하는가. 알려져 있다시피 잡스는 폭군에 가까운 기업가였고 인색한 자본가였다. 잡스의 에너지는 반경 10미터 이상 떨어진 사람을 열광시키고, 5미터 내의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한다는 너스레가 어디선가 들려왔으며, 애플의 직원들은 잡스가 원하는 것이 ‘예스’와 ‘사표', 둘 중의 하나라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랑한 잡스는 기업가나 자본가가 아니라 상상을 실현해내는 장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돈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은 매우 웃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죠. 하지만 돈 버는 일은 내게 통찰력을 주는 일도, 가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핵심은 소프트웨어예요. 사실 소프트웨어는 사용자 경험이죠.” 우리가 잡스를 혁신가라고 말할 때, 그 때의 혁신이란 경영의 혁신이 아닌 경험의 혁신을 뜻한다. 하나씩하나씩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제품에 구현해내는 잡스의 집요함과 성실함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꾀로 승부하는 천재가 아니라 숙련된 장인이었다. 완전한 경영보다 완전한 제품에 관심이 많았던 천생 장인이었다. 이것이 지난 세월 ‘애플=잡스’였던 까닭이다. 그는 흩어져 있던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구현했으며, 하드웨어의 완성도를 유례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미켈란젤로는 돌을 자르는 방법에 대해서도 엄청난 지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애플은 개방을 무기로 하는 구글 진영으로부터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사용자 경험의 품격을 우선시하던 잡스로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경쟁 제품들이 산문이라면 애플의 제품은 시(詩)였다. “난 가능한 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목수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장롱 뒷면에 형편없는 나무를 쓰지 않습니다.”
혁신은 허기, 즉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혁신은 사용자가 아니라 기업을 위한 것이다(혁신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애플이 이룬 혁신은 시장의 발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제 잡스는 갔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반찬이든 보험이든 돈이 되면 달려드는 문어발 경영의 달인들에게 애플의 단출한 제품군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최선을 다해 밥을 먹는 족벌 경영의 달인들에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당한 잡스가 바보가 아님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길이 없다. “내가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고 일어나니 ‘애플빠’가 되어 있던 나의 숙제는 물신(物神)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는 일이었다. 잡스가 눈을 감아 이제 나의 탈주가 조금 더 쉬워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바란 것은 이런 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허망하다.
글/ 김승현
- 본문 중 큰따옴표 안의 인용구들은 모두 잡스가 남긴 말이다.
- 이 글은 월간 디자인에 기고한 것이다.



